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루마 왕국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tarunamagara.png]]}}} 타루마 왕국에서 당대 문헌으로 남긴 것은 비문들뿐이지만, 이 왕국의 왕사는 17세기 자바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를 비롯하여 자바의 여러 후대 문헌에서 언급되며 왕들의 계보와 재위 기간은 오늘날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타루마"라는 지명은 당대 기록 크본코피 제1비문(Prasasti Kebon Kopi I), 잠부 비문(Prasasti Jambu) 등에서 언급되므로 당대 현지에서 사용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당대 기록으로 중국계 사료도 약간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타루마에서 528–535년과 666–669년 사이 중국으로 보낸 사신들의 기록이 있다. 타루마 왕국은 자바 서부 선사 시대 [[부니 문화]]가 인도화되어 기록 문화를 갖추고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로 보면 타루마 시대의 유물은 이전 부니 문화의 유물과 연속성이 있다. 타루마 왕국은 [[코뿔소]] 뿔, [[상아]], [[거북]] 등껍질 등 수렵으로 얻은 물품 외에 채광한 금·은 등 광물도 수출하며 인근 지역과 무역하였다. 이하에서 연대기를 출처로 하는 경우 출처는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를 비롯한 《왕사크르타 필사본》인데, 서적으로 정리된 것으로는 오늘날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는 해도 17세기에 정리되어 기록된 문헌인 관계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오늘날 타루마와 순다 초기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근세 연대기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세 연대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비문 기록 등 당대 기록에만 의존하는 역사학자도 많고, 근세 연대기보다 더 오래된 연대기가 추가적으로 발견된다면 타루마와 순다 초기의 역사는 상당히 크게 바뀔 수도 있다. 타루마 왕국의 왕 가운데 특히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재위한 3대 왕 푸르나와르만(Purnawarman, 재위 395–434)에 대한 당대 비문 기록이 풍부하여 이로부터 자바의 초기 역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푸르나와르만의 치세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역사적으로 특기할 만하다. 우선 투구 비문(Prasasti Tugu, 5세기 초)에는 왕이 지역의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물길을 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이미 관개 사업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치당히양 비문(Prasasti Cidanghiyang, 4–5세기), 치아루튼 비문(Prasasti Ciaruteun, 5세기 초) 등에 따르면 푸르나와르만 왕은 주로 북인도에서 발달한 비슈누파 힌두교를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자바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지배층이 신봉한 힌두교는 비슈누파가 아닌 시바파였음을 고려하면 이는 이례적이다.[* 당대 [[굽타 제국]]의 군주는 대개 비슈누파였으며, 6세기 굽타 제국의 분열과 몰락으로 북인도에서 비슈누파 신앙이 퇴조하였다. 타루마 왕국 중기는 아직 굽타 제국이 건재하던 때였으므로 비슈누파 신봉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 《왕사크르타 필사본》을 신뢰한다면, 푸르나와르만 왕은 397년 오늘날 [[자카르타]]와 [[브카시]] 인근에 해당하는 지역에 새 도읍 순다푸라(Sundapura)를 건설하고 인근 지역에 398년부터 399년까지 큰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타루마 왕국이 단순한 [[도시국가]] 수준은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한 물증은 없으나 연대기 기록에 바탕하면 6세기 중반 이후 타루마 왕국의 수도는 순다푸라에서 동쪽 어딘가로 이동했고, 순다푸라는 타루마 왕국 산하 순다 지방의 중심지로만 남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옛 수도 순다푸라 지역을 중심으로 순다 지방은 점점 독립성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36년에 기록된 무아라치안튼 비문(Prasasti Muara Cianten)은 2021년 현재 완전히 해독되지 못했지만, 이것이 순다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이때 이미 순다 지역의 영주(또는 왕)가 타루마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설을 따르면 6세기 중반 이후 순다의 중심지는 순다푸라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타루마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불명확하다. 6세기를 다루는 연대기 기록 일부는 타루마 왕국에서 중앙 집권이 약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세가 강해졌음을 가리키고 있다. 순다 지역 외에도 수랴와르만(Suryawarman, 535–561)의 치세에, 수랴와르만 왕의 딸 티르타 칸차나(Tirta Kancana)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왕국 동부 갈루 지역을 다스리게 된 영주 마니크마야(Manikmaya)[* 인도에서 도래해 지역에 정착한 찰란카야나(Calankayana) 가문에 속한 인물이다.]는 오늘날 가룻(Garut) 지방에 해당하는 큰단(Kendan)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타루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반독립적 세력을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대기에 따르면 마니크마야의 한 아들은 타루마 도성에서 왕과 함께 지냈으며, 나중에 타루마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또 이후 7세기 중반 재위한 왕 링가와르만(Linggawarman)의 둘째 딸 소바칸차나(Sobakancana)는 나중에 스리위자야의 왕이 되는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yanasa, 스리위자야 국왕 재위 671–702)와 결혼하였다. 타루마 왕국은 7세기 후반에 약화되고 멸망하며, 이후 [[순다 왕국|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으로 분리된다. 타루마의 멸망과 분리가 7세기 후반에 일어났다는 것은 상당히 믿을 만하지만, 그 정확한 과정은 다소 불명확하다. 우선 7세기 초·중반에 마니크마야의 손자로 타루마 동부 갈루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우르티칸다윤(Wretikandayun)은 독립성을 주장하였고, 동부에 명목상으로만 타루마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갈루 왕국이 존재하였다. 갈루 왕국의 확실한 성립(반독립적 왕국 수립) 시점에 대해서는 6세기 중반 설(마니크마야의 독립)과 7세기 초·중반 설(우르티칸다윤의 독립) 두 가지가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우르티칸다윤은 큰단에서 보다 동쪽인, 즉 순다 지방에서 보다 먼 카왈리(Kawali, 오늘날의 치아미스Ciamis)로 세력 중심지를 옮겼다. 7세기 중반까지 타루마를 통치한 링가와르만 왕은 아들이 없었고, 링가와르만 왕의 맏딸 마나시(Manasih)가 순다 지방의 영주 타루스바와(Tarusbawa)와 결혼하였는데 타루스바와가 링가와르만 왕을 계승하여 타루마 왕국은 사라지고, 7세기 중반 또는 말 순다 왕국이 자바 서부의 주류 세력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타루스바와의 집권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루스바와의 집권으로 우르티칸다윤이 이끄는 갈루 세력은 타루스바와를 타루마 전체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완전한 독립 세력이 되었다. 또한 타루마 세력 또는 순다 세력은 7세기 후반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세력과 전쟁을 벌이고 패배하여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86년에 기록된 [[방카섬]]의 코타카푸르 비문(Prasasti Kota Kapur, 고대 [[말레이어]])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이 자바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적혀 있으며, 확실한 전투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686년 전후 스리위자야의 자바 서부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스리위자야가 승리하였다고 본다. 순다의 초대 왕 타루스바와는 치세에 수도를 해안에 위치한 순다푸라에서 약간 내륙인 오늘날의 [[보고르]] 인근으로 옮겼는데, 이 천도는 스리위자야 세력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고고학 연구진은 1984년 카라왕현(Karawang)의 바투자야(Batujaya)에서 고대 사원들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바투자야 사원군 가운데 지와 사원(Candi Jiwa), 블란동안 사원(Candi Blandongan) 등은 4–5세기 타루마 시대에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이들 건축물의 상단부가 사라지고 기단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 사원들은 2020년 현재 남아 있는 타루마 시대의 건축물 유적 가운데[* 타루마 시대의 유물은 종종 발굴되어 왔으며, 20세기 중반부터 타루마 시대의 건축물 유적이나 적어도 그 흔적은 조금씩 발굴되었지만 2020년 현재 아직 바투자야 사원군 정도 규모의 유적은 더는 없다.] 상태가 가장 좋은 편이다. 지와 사원은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온전했던 과거에는 불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